마키노 노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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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키노 노부아키는 1861년 사쓰마번에서 태어나 일본의 외교관,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오쿠보 도시미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마키노 가문의 양자가 되었으며,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여하여 미국에서 유학했다. 이후 외무성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파리 강화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했다. 궁내대신, 내대신을 역임하며 쇼와 천황의 신임을 받았고, 2·26 사건 당시 습격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일본기원의 초대 총재를 지내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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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와 경력
1861년 사쓰마번의 무사 오쿠보 도시미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곧 마키노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1871년 11세의 나이에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가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에서 학교를 다녔다. 귀국 후 도쿄 제국대학에 들어갔지만 중퇴하고 외무성에 들어갔다. 런던 대사관에 부임하면서 이토 히로부미와 알게 되었다.
그 후 후쿠이현 지사, 이바라키현 지사, 문교부 차관, 오스트리아 대사, 이탈리아 대사를 거쳐 제1차 사이온지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맡았고, 외교관 시절의 공적으로 남작위를 받았다. 제2차 사이온지 내각에서 농상 대신, 추밀원 고문관을 맡기도 하였다.
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서는 외무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이토 히로부미, 사이온지 긴모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자유주의 운동의 초기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일본의 전권 대사로 참석하였다.
1921년 궁내성 대신이 되었고, 자작으로 승작되었다.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내대신으로 재임하였고, 취임 직후 백작으로 승작되었다. 쇼와 천황의 신뢰가 두터웠으며, 퇴임 의사를 밝히자 천황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1936년 2·26 사건 때에는 유가와라에서 습격을 당했으나, 손녀 가즈코의 재치로 위기를 모면했다.
일본기원 초대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개전까지도 고문으로서 쇼와 천황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전후에는 "늙은 자유주의자" 중 한 명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하토야마 이치로의 추방 이후 자유당 총재직은 건강과 노령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1949년 1월 25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후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묻혔다.
총리를 지낸 요시다 시게루는 그의 사위이며, 아소 다로는 마키노의 증손자이다.
2. 1. 출생과 성장
1861년 11월 24일, 가고시마현 사쓰마번에서 사쓰마 번사 오쿠보 도시미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키노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1868년 양아버지 요시노스케가 보신 전쟁 중 호쿠에쓰 전쟁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마키노 성을 유지한 채 오쿠보 가문에서 자랐다.1871년, 11세의 나이에 아버지 오쿠보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가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에서 학교를 다녔다.[2] 귀국 후 도쿄 제국대학에 들어갔지만, 중퇴하고 외무성에 들어갔다.[14][15][16]
2. 2. 외교관 및 관료 경력
1871년 (메이지 4년), 11세에 아버지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가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의 중학교에서 공부했다.[14] 1874년 (메이지 7년)에 귀국하여 개성학교(후의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14] 1880년 (메이지 13년), 도쿄 대학을 중퇴하고 외무성에 들어갔다.[15][16] 런던의 일본 대사관에 부임하여,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을 방문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었다.귀국 후, 태정관 권소서기관, 법제국참사관[17], 효고현 대서기관, 구로다 기요타카총리 비서관[18][19], 후쿠이현 지사, 이바라키현 지사, 문부 차관[20], 주 이탈리아 공사, 오스트리아 공사 등을 역임했다.
마키노는 태정관 권소서기관 시절, 이토를 수행하여 베이징에서 이토와 리훙장과의 기 싸움을 직접 경험했다고 한다.[21] 오스트리아 공사 시절에는 일본과 그리스와의 통상 조약 체결, 러시아와의 전쟁을 예상한 정보 선전 조작,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군주국의 동향 조사 등을 수행했다. 유럽에서 황화론의 확산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며, 영국 왕실 외교의 유효성을 지적했다.[22]
제1차 사이온지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맡았을 때, 1907년 (메이지 40년) 11월 4일에 외교관 시대의 공적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23] 제2차 사이온지 내각에서는 농상무대신을 역임했고, 추밀 고문관으로 전임한 후, 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외무대신이 되었다.
1919년 (다이쇼 8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파리 강화 회의에 차석 전권대사로 참가했다. 일본 대표단의 수석은 사이온지 긴모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마키노가 지휘했으며, 수행원에는 고노에 후미마로, 사위인 요시다 시게루, 마쓰오카 요스케 등이 있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의 차석 전권대사로서 인종 차별 철폐 제안을 했다. 1920년 (다이쇼 9년) 9월 7일, 마키노는 파리 강화 회의의 공로로 남작에서 자작으로 승작되었고, 동시에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
2. 3. 파리 강화 회의와 궁내성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마키노 노부아키는 파리 강화 회의에 일본의 전권 대사로 참석하였다.[4] 이 회의에서 마키노와 일본 대표단은 인종 평등 제안을 제출했으나, 의장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었다.[4]1920년 9월 20일, 마키노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다.[5] 1921년 2월에는 궁내성 대신이 되었고, 자작 작위로 승진했다.[5]
마키노는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하여, 천황 및 궁중 주변에 광신적인 황실 숭배자들이 있으면 황실이 정치적 소란에 휘말릴 것을 우려한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추천으로 궁내대신에 임명되었다고 한다.[5] 그는 궁내대신으로서 영일 관계와 미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사이온지 긴모치와 함께 천황이 정치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5]

2. 4. 내대신과 2·26 사건
1925년 내대신에 취임하여 1935년까지 재임하였고, 취임 직후 백작 작위를 받았다.[26] 마키노에 대한 쇼와 천황의 신뢰는 두터워, 퇴임 의사를 밝히자 천황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마키노는 이후에도 궁중과 외교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고, 1936년 2·26 사건 때에는 유가와라에서 습격을 받았으나, 손녀 가즈코의 재치로 위기를 모면했다.[9]2. 5. 전후 활동과 사망
1921년 궁내성 대신이 되었고, 자작으로 승작되었다.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한 그를 궁내대신에 앉힌 것은, 천황 및 궁중 주변에 광신적인 황실 숭배자를 두는 것으로 인해 황실이 정치적 소란에 말려드는 것을 우려한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의향이었다고 한다.1925년 내대신에 취임하여 1935년까지 재임하였고, 취임 직후 백작으로 승작되었다. 마키노에 대한 천황의 신뢰는 두터워, 퇴임 의향을 묻자 쇼와 천황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마키노는 그 후에도 궁중과 외교에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 했고, 1936년 2·26 사건 때에는 유가와라에서 습격을 당했으나, 손녀딸 가즈코(和子)의 재치로 위기에서 벗어났다.[28] 제2차 세계 대전 개전까지도 고문으로서 쇼와 천황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일본기원 초대 총재를 지내기도 한 마키노는 전후에 '늙은 자유주의자(old liberalist)' 중 한 명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아, 한때 하토야마 이치로 추방 이후 자유당 총재가 될 뻔했으나, 건강과 노령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1949년 1월 25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후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묻혔다.[30][31]
전후 일본 총리가 된 요시다 시게루는 사위이며,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아소 다로는 마키노의 증손자에 해당한다.
3. 가계도
마키노는 오쿠보가 외에 친척인 미시마가, 이주인가, 아키즈키가의 사람들과 평생 변함없이 친교를 맺었다.[33]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후, 오쿠보 도시카타가 도시타케, 노부아키, 요시다 시게루를 런던으로 초대했다.[88] 도시카즈, 노부아키, 도시타케의 연상인 3형제가 중심이 되어, 매년 5월 14일의 도시미치의 기일을 축제라고 칭하며 모였다. 도시미치의 100주기까지 매년 행하고, 그 후에는 5년마다 행하고 있다.[89] 노부아키의 희수에도 회합을 가졌다.[90]
4. 평가 및 논란
마키노 노부아키는 이토 히로부미의 영향을 받아 대인 관계에서 장점을 보고 단점을 보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32]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무조건 부정하지 않고 재고하는 신중함을 보였다.[33] 미우라 고로는 마키노를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했다.[32]
기도 고이치는 마키노에 대해 "매우 머리가 유연했고, 젊은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회고했다.[34] 마키노는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회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35]
그는 예술과 문화에도 기여했는데, 오카쿠라 텐신과의 깊은 우정을 통해 메이지 시대 미술계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문전을 창설하고 제국도서관(현 국립국회도서관) 설치에 진력했으며, 1918년에는 재단법인 계명회를 설립하여 일본 최초의 학술 재단을 만들었다.
바둑 애호가로서 일본기원 초대 총재를 역임하고, 바둑전당에 입성하는 등 바둑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43] 독서와 영화 감상 등 다양한 취미를 즐겼으며, 문학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44]
마키노 노부아키는 내대신으로서 쇼와 천황을 보좌하며 천황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리에 사치오 일기』에 따르면, 1935년 마키노가 군부에 의해 해임될 위기에 처하자 천황이 그의 사임을 재가하는 서류를 보고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4. 1. 긍정적 평가
이토 히로부미는 사람의 장점을 보고 단점을 보지 않았는데, 마키노 노부아키의 대인 관계는 이토에게서 배운 것이다.[32]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자신의 의견과 달라도 무조건 부정하지 않고 재고하게 했다.[33] 미우라 고로는 마키노를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했다.[32] 내대신 시절 비서관장으로 모셨던 기도 고이치도 마키노는 "매우 머리가 유연했고, 젊은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평했다.[34] 마키노에게는 "보수"와 "진보"의 양면성이 있었으며, 아리마 요리야스의 동화 문제에 대한 노력을 평가하거나, 오카와 슈메이나 야스오카 마사히로를 존왕가로 평가하기도 했다. 마키노는 황실을 옹호해 나가는 가운데 사회의 변동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또한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35]마키노 노부아키는 내대신으로서 젊은 쇼와 천황을 보좌했는데, 세계 대전으로 향하며 혼미해지는 세계 정세 하에서 천황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리에 사치오 일기』에 따르면 마키노가 군부에 미움을 받아 해임이 결정된 1935년 12월 26일에 마키노의 사임을 재가하는 서류를 보고 천황이 목 놓아 울었다는 증언이 있다.
마키노는 자신도 관심을 가졌던 예술・문화에 기여한 바가 있다. 메이지 시대 미술계의 지도자였던 오카쿠라 텐신은 개성학교에 마키노가 입학한 다음 해에 입학했다. 마키노가 14, 5세 무렵부터 4, 5년 동안 동급생으로 지냈지만, 마키노의 인식에 따르면 텐신의 학력은 동급생으로서 항상 뛰어났다. 영문학에 통달했으며, 영작문 내용에서는 도저히 자신은 따라갈 수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텐신은 문부 차관이었던 마키노에게 미술학교장의 입장에서 미술학교의 예산을 요구하는 등, 그 후에도 양자의 관계는 텐신이 사망할 때까지 평생 우정으로 이어졌다.[40][41] 1907년(메이지 40년)에는 마키노는 문부성 미술전람회(문전)을 창설했다. 또한 마키노는 제국도서관(현・국립국회도서관)의 설치에 진력했다.
또한, 마키노 및 히라야마 나리노부가, 아카보시 테츠마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문화 연구 장려 및 강연, 출판을 위한 공익법인인 재단법인 계명회를 1918년 8월 8일에 설립했다. 문부성(현・문부과학성) 관할로서는 일본 최초의 학술 재단이 되었다.
마키노의 취미로는 바둑, 독서, 가부키 감상, 영화 감상이 있다. 자택이나 찻집에서 바둑 모임을 개최했으며, 5·15 사건 때도 대국 중이었다.[42] 모리 아리노리 문부상과도 바둑을 두었다. 1924년부터 1946년까지, 일본기원 초대 총재를 역임했다. 2023년(레이와 5년)에는 일본기원의 제20회 바둑전당에 입성했다.[43]
독서는 일본, 서양의 구별 없이 문학에서 시사, 논픽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영어 소설부터 『니폰 타임즈』도 읽었다.[42] 가와카미 테츠타로, 고바야시 히데오 등 문학계 인사를 초대하여 환담하는 일이 있었다.[44] 마키노는 유년 시절에 사이고가 오쿠보가의 현관을 방문하여 오쿠보가의 집사가 횡령을 한 것을 질책하는 모습을 목격했다.[46] 또한, 셜로키언의 선구자적 존재로도 유명하다.
마키노는 오쿠보가 외에 친척인 미시마가, 이주인가, 아키즈키가의 사람들과 평생 변함없이 친교를 맺었다.[33]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후, 오쿠보 도시카타가 도시타케, 노부아키, 요시다 시게루를 런던으로 초대했다.[88] 도시카즈, 노부아키, 도시타케의 연상인 3형제가 중심이 되어, 매년 5월 14일의 도시미치의 기일을 축제라고 칭하며 모였다. 도시미치의 100주기까지 매년 행하고, 그 후에는 5년마다 행하고 있다.[89] 노부아키의 희수에도 회합을 가졌다.[90]
4. 2. 부정적 평가
미우라 고로는 마키노를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32]。기도 고이치는 마키노가 "매우 머리가 유연했고, 젊은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평가했다[34]。 마키노에게는 "보수"와 "진보"의 양면성이 있었으며, 아리마 요리야스의 동화 문제에 대한 노력을 평가하거나, 오카와 슈메이나 야스오카 마사히로를 존왕가로 평가하기도 했다[35]。4. 3.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한국의 관점)
마키노 노부아키는 이토 히로부미에게서 사람의 장점을 보고 단점을 보지 않는 대인 관계를 배웠다.[32]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자신의 의견과 달라도 무조건 부정하지 않고 다시 생각하는 태도를 가졌다.[33] 미우라 고로는 마키노를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지 않는 신중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32] 기도 고이치는 마키노가 매우 머리가 유연했고, 젊은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34]마키노는 보수와 진보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리마 요리야스의 동화 문제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오카와 슈메이나 야스오카 마사히로를 존왕가로 평가하는 등 사회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35]
내대신으로서 젊은 쇼와 천황을 보좌했던 마키노는, 세계 대전으로 향하는 혼란스러운 세계 정세 속에서도 천황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리에 사치오 일기』에 따르면, 1935년 12월 26일 군부에 의해 마키노의 해임이 결정되었을 때, 천황이 그의 사임을 재가하는 서류를 보고 목 놓아 울었다는 증언이 있다.
5. 수상 경력
6. 저서
- 牧野伸顕日記일본어, 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 1990년.
- 松濤閑談일본어, 창원사(創元社), 1940년 6월.
- 개국과 흥국과 외교와 松濤閑談일본어, 서사심수(書肆心水), 2020년 7월.
- 回顧録일본어 전3권, 문예춘추신사(文藝春秋新社), 1948년 1월-1949년 12월.
- 回顧録일본어 상하권, 중공문고(中公文庫), 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 1977년 12월-1978년 1월.
- 回顧録일본어 상, 개정판, 중공문고(中公文庫), 중앙공론신사(中央公論新社), 2018년 5월.
- 回顧録일본어 하, 개정판, 중공문고(中公文庫), 중앙공론신사(中央公論新社), 2018년 5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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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野伸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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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野伸顕伯の思い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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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野伸顕と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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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でいう「[[東京大学 (1877-1886)|(旧)東京大学]]」は(東京)開成学校の後身で(東京)帝国大学の前身校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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授爵敍任及辭令 / - / - / 牧野伸顯外二名
188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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授爵敍任及辭令 / - / - / 牧野伸顯外一名(文部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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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聞集成大正昭和編年史刊行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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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村道碩、牧野伸顕、加藤正夫が囲碁殿堂入り(第20回囲碁殿堂表彰)
https://www.nihonkii[...]
日本棋院
2023-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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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上徹太郎『文學界』1940年5月号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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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正二位牧野伸顕位階追陞の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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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3753号「叙任及辞令」1896年1月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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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号外「叙任及辞令」1907年3月3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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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第3801号「叙任及辞令」
1925-04-27
[77]
간행물
『官報』第989号「叙任及辞令」
1930-04-19
[78]
간행물
『官報』第1228号「叙任及辞令」
1931-02-04
[79]
간행물
『官報』第2511号・付録「辞令二」
1935-05-20
[80]
간행물
『官報』第2725号「叙任及辞令」
1936-02-04
[81]
웹사이트
内大臣伯爵牧野伸顕外三十七名満洲国勲章受領及佩用ノ件
https://www.jacar.ar[...]
[82]
논문
2013
[83]
서적
『貴族院要覧(丙)』昭和21年12月増訂
貴族院事務局
1947
[84]
서적
斎藤実関係文書目録
国立国会図書館
1995-03
[85]
서적
第十二版 大衆人事録
1937
[86]
서적
歴史REAL 敗者の明治維新
洋泉社
2018
[87]
서적
豪閥 地方豪族のネットワーク
[88]
논문
2013
[89]
논문
2013
[90]
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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